[책 후기] 어느 멋진 도망 (나상천)
- 2026년 7월 31일 오후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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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범 교수님
김성범 교수님
어느 멋진 도망 (나상천) 후기
가끔 힘든 꿈을 꾼다. 시험을 보는데 첫 문제에서 막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꿈, 이미 전역한 지 오래인데도 다시 군대에 입대하는 꿈, 비행기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 집에서 짐도 싸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는 꿈. 꿈에서 깨고 나면 안도하면서도 한동안 마음 한구석이 무겁다. 이런 꿈들은 내 안에 아직도 과거의 내가 여러 모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 마음속에 꽁꽁 숨어 있는 그때의 나를 만나 괜찮다고, 이제는 다 지나갔다고 다정하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나상천 작가가 실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어느 멋진 도망”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지난주 내내 조금씩 읽다가 오늘에서야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극적인 사건이나 숨 가쁜 전개가 있는 소설은 아니지만, 오히려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읽는 내내 마음에 오래 남는 울림이 있었다. 빵빵한 노이즈 캔슬링 에어팟을 끼고 잔잔한 첼로 음악과 함께 읽으니 몰입감이 훨씬 컸다. 소설 속 인물 도로시가 작곡한 「말 대신」(경서)을 함께 찾아 들으며 읽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나처럼 테스토스테론은 줄고 눈물은 많아진 중년 남성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어린 딸아이를 남겨둔 채 아내와 어머니를 하루 차이로 잃고 깊은 상실감에 잠겨 있던 저자는 33일 동안 800km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그 길에서 얻은 깨달음은 의외로 단순하다. 멈출 줄 아는 것, 쉴 줄 아는 것, 그리고 나로 서는 것. 내가 나로 설 수 있어야 비로소 타인이 보인다는 말이 오래 남았다. '나를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젊었을 때는 막연하게만 느껴졌는데, 이제 만으로도 쉰셋이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어쩌면 나를 안다는 것은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라, 애써 외면해 왔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당장이라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고 싶어진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왜 걷는지에 대한 이유를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만 같다. 지금은 현실적인 이유로 쉽진 않지만 언젠가는 순례길을 걸어 보고 싶다. 그리고 거기서 내 안 깊숙이 꽁꽁 숨어 있는 나를 만나, "이젠 괜찮다."며 가만히 토닥여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