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3월 16일 오전 6:31
- 조회수: 101
김성범 교수님
기억과 기록, 그리고 미래
사람을 포함한 동물들의 기억력 지속시간은 얼마나 될까? 물론 이 질문에 하나의 숫자로 답하기는 어렵다.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작업기억·장기기억·공간기억·사회적 기억처럼 기억의 종류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이 있다. 기억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는 능력은 단순히 과거를 붙잡아 두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하고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기억이 오래 지속된다는 것은 과거의 정보를 오랫동안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다시 꺼내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곧 경험을 자산으로 바꾸는 능력과도 같다.
반대로 기억 지속시간이 극도로 짧다면,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거의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게
된다. 가령 어떤 동물이 독이 있는 버섯을 먹고 심한 배탈을 겪었다고 하자. 정상적인 기억 체계를 가진 동물이라면 그 불쾌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는 그 버섯에 가까이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만약 기억력 지속시간이 겨우 3분에 불과하다면
어떨까. 3분 동안은 그 버섯을 피하겠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왜 배탈이 났는지 잊어버린 채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다. 이처럼 기억은 단순한 저장
기능이 아니라, 미래의 선택과 행동을 이끄는 생존의 장치이다.
기억의 중요성은 인간에게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인간은
본래도 비교적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는 종이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기억을 외부에 저장하는 방법까지
만들어 냈다. 문자와 숫자를 발명했고, 이를 통해 기록을
남겼으며, 더 나아가 인쇄술과 같은 기술을 통해 그 기록을 널리 전달하는 체계까지 구축했다. 이는 인간의 기억 지속시간을 사실상 개인의 생애를 넘어 세대와 시대를 관통하도록 확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한 개인의 뇌는 유한하지만, 기록은 무한히 축적되고 전승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날 조선시대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 의해 폐위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기록
덕분이다.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 사건을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기억을 단지 뇌 속에만 보관하지 않고, 종이와 책, 제도와 문화 속에 저장해 왔다. 그리고 바로 그 축적된 기억 위에서
문명이 발전해 왔다. 철학, 문학, 과학, 의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은 선대의 기록과 성찰 위에서 성장했다. 과거의 사유와 실험, 성공과 실패가 남겨졌기에 다음 세대는 같은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고,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과거를 오래 기억할수록 미래를 더 정교하게 설계할 수 있다. 인간이 실수를 줄이고, 지식을 축적하며, 문명을 발전시켜 온 이유도 결국 기억의 힘에 있다. 그런 점에서
기억은 단순히 지나간 시간을 보관하는 기능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 인공지능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인공지능
모델 역시 과거에 축적된 방대한 기록, 곧 데이터에 기반해 만들어진다.
인간이 경험과 기록을 통해 배우듯, 인공지능도 데이터라는 형태로 남겨진 과거를 학습하여
새로운 판단과 예측을 수행한다. 결국 인간의 문명과 인공지능의 발전 모두, 과거를 얼마나 잘 기억하고 축적하며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