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5월 7일 오후 2:26
- 조회수: 3047
DMQA
화창한 봄날씨를 맞이하여 연구실 멤버 모두 캠퍼스내 애기능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매년 이맘때면 붉은 연산홍으로 뒤덮이는 애기능은 고려대학교에 명소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애기능유래
애기능은 원래 인명원(仁明園)으로 얼마전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이산의 주인공 정조의 후궁인 원빈(元嬪) 홍씨(洪氏)의 묘소로 애기능 터라 불리우게 되었다. 원빈 홍씨는 정조의 최측근인 홍국영의 누이동생이다. 영조 42년(1766)에 태어나 정조 2년(1778) 6월 정조의 후궁이 되었으나, 이듬해 5월 7일 병사하였다. 이에 정조는 조회를 5일 간 정지하고 시호를 인숙(仁淑), 궁호를 효휘(孝徽), 원호(園號)를 인명(仁溟)으로 정하여 7월 3일 장례를 치루었다. 특히 원빈 홍씨의 묘소에는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등과 함께 각 2구씩의 돌로 만든 말(馬石), 돌로 만든 양(羊石)의 석수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왕의 생모가 아닌 후궁 묘소의 설치로는 예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묘의 상설도 원빈 홍씨의 묘소가 1950년 6월 13일 서삼릉내의 귀인과 숙의의 묘역으로 이장됨에 따라 혼유석과 표석만이 함께 옮겨져 있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정조비 효의왕후 김씨는 정조의 세손시절 혼인하였으나, 아이를 낳지 못하여 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의지에 의해 간택령을 내렸는데, 대비 측의 바람과는 달리 이 간택령에서 후궁으로 간택된 것은 정조의 측근인 도승지 홍국영의 여동생인 원빈 홍씨였다. 실록에 원빈에 대한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그 오라비인 홍국영의 권세가 원빈 홍씨로 인하여 더욱 강해졌다는 것과 자녀하나 없는 원빈 홍씨가 요절한 뒤 묻힌 무덤의 이름이 ‘인명원’이라는 점에서 대우가 극진했다는 정도이다. 이는 다소 관례에 어긋나는 것인데 ‘원’은 보통 왕세자의 무덤이나 왕을 낳은 후궁의 묘에 붙여지기 때문이다.
처음 인명원지(仁明園址)에는 태조 5년(1396) 무학대사가 창건한 영도사(永導寺)가 있었는데, 정조 때 부근에 인명원이 들어앉게 됨에 따라, 절이 원에서 가깝다 하여 인명원 동북쪽 지점으로 옮기고 이름도 개운사(開運寺)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애기능과 직접적으로 관련은 없지만, 이곳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서 출토된 분청사기인화문 태항아리가 관심을 끈다. 이 도자기는 국보 제 177호로 지정되어 있고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태를 즉시 항아리에 담아 산실(産室)안에 미리 점지해놓은 길방에 안치하여 두었다가 길일을 택하여 태를 깨끗이 씻은 다음 항아리에 잘 밀봉하여 태실지(胎室地)를 정해 묻는 풍습이 있었다. 이 태항아리는 이러한 조선시대 태를 묻는 풍속의 전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애기능 근처에서 이전에도 이러한 태항아리가 또 하나 발견되어 토목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토목회사 사장에게 갖다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토목회사 사장이 아무런 사례를 하지 않아 또 다른 태항아리가 발견되자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인부들이 이를 가져온 것이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인부들에게 돼지 한 마리와 막걸리 10말 값을 주어 사례를 하였다고 한다. 국보 제177호 태항아리는 이렇게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오게 된 것이며, 이를 계기로 애기능의 유래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또한 우리 고려대학교의 캠퍼스가 왕실에서 탐내는 왕기가 서려있는 유서가 깊은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봄에 핀 철쭉을 보며 정조의 후비 원빈 홍씨의 요절을 아쉬워하고, 왕실의 왕자나 공주 아기씨 왕기를 느껴봄이 어떠한가?
출처: http://www.korea.ac.kr/do/MessageBoard/ArticleRead.do?id=47cee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