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참 중요하다. 어쩌면 우리가 그 가치를 너무 쉽게 지나치는 건 아닐까. 최근 인공지능이 주목받는 이유도 결국기록에 있다. 인공지능 모델은 데이터를 통해 학습하는데, 그 데이터란 결국 인간의 기록이 축적된 결과다.


기록이라고 하면 흔히 역사책이나 고서 같은 거창한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일상에서 끊임없이 남겨지는 자취들이 모두 기록이다.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한 내용,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판 흔적, 학교나 직장을 오간 이력, 제품이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과정, 야구 경기내용, 몸의 건강 상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하루하루를 담은 일상들. 이런 사소해 보이는 기록들이 모여 삶을 설명해 주는 근거가 된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록은 바로일기. 일기는 단순히 하루를 정리하는 행위가 아니다.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스스로 기억하게 해주고, 지나온 시간들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주는 소중한 수단이다. 우리는 쉽게 과거를 잊고 현재에 휘둘리며 살아가곤 한다. 하지만 기록이 있다면, 삶을 잊지 않고쌓아갈 수 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나는 2012 6 22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의 기억은 대부분 사진에 의존해야 할 뿐이다. 어린 시절은 그렇다 치더라도, 성인이 된 이후의 내 삶이 어땠는지 문득문득 궁금해질 때가 많다. 대학 시절, 군 복무 시절, 조지아텍 유학 시절, 텍사스대학교 교수로 일하던 시간들... 얼마나 치열하고도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나. 그 시절 나는 뜨겁게 사랑했고, 낮밤을 가리지 않고 깊이 공부했으며, 한 여인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처음으로대학교수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고,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미국에서 보낸 10년의 생활은 그 자체로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런데도 그 시절의 하루하루가 어떠했는지, 이제는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는다. 기록하지 않았으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래도 다행인 것은, 2012년 이후에 나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꺼내 볼 수 있다. 기록은 미래에 꺼내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를 보다 또렷이 살아가기 위한 장치다. 오늘을 잘 기억하면, 어제가 자연스레 연결되고 내일은 더 깊이 있게 다가온다. 그렇게 쌓여가는 삶은 어느새 풍요로워지고, 결국엔 행복으로 이어진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다. 기억되지 않으면 내 삶은 흘러갈 뿐, 쌓이지 않는다.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진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