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영 작가님의 "시대예보: 수고인류의 시간, 배움의 재정의" 강연을 들었다. 송 작가님도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고, 아름다운 고려대학교 인문계 캠퍼스에서 학생들과 함께 좋은 강연을 들으니 더욱 뜻 깊은 시간이었다.  여러 사례와 흥미로운 슬라이드를 따라가다 보니,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아졌다. “AI 시대에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것인가?”


과거에는 근면함이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다. 정해진 일을 빠짐없이 수행하고, 같은 기준 아래에서 더 높은 점수와 더 많은 자격을 갖춘 사람이 인정받았다. 하지만 AI의 등장으로 이러한균일한 성실성은 더 이상 인간만의 경쟁력으로 남기 어려워졌다. 정해진 일을 AI가 더 정확하고, 더 빠르고, 더 오래 반복할 수 있다면, 인간은 자신만의 차이에서 가치를 찾아야 한다.


송 작가님의 표현처럼, 이제 중요한 것은멋지게 흐트러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가치가 생기지는 않는다. 자신만의 경험과 생각, 취향과 선택이 쌓여 다른 사람이 쉽게 복제할 수 없는원본성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사본이 무한해질수록 원본의 아우라는 상승한다는 말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생성형 AI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분석까지 한다. 그럴듯한 결과물을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낼 수 있게 될수록, 그 뒤에 있는 사람의 경험과 관점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누가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실제로 무엇을 경험했는지, 어떤 질문을 오래 붙들고 고민해 왔는지가 결과물의 가치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AI의 능력이 커질수록 인간의 진짜 경험과 고유한 관점은 오히려 더 귀해질지도 모른다.


또 하나 인상적인 내용은지금의 조직은 목적지가 아니라 도움닫기다였다. 우리 세대에게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은 삶의 중요한 목표였다.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그 조직 안에서 인정받는 것이 성공의 전형적인 경로였다. 하지만 조직은 내가 세상과 만나고, 역량을 키우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어야 한다. 결국어느 조직에 속해 있는가?”를 넘어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 메시지는 대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느 대학에 입학했는지가 학생의 최종 목적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좋은 성적과 자격증을 얻는 것만으로 교육의 목적이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대학은 학생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며, 누구에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는지 탐색하는 도움닫기의 공간이어야 한다.


방향 없이 분주한 것은 수고의 반댓말이라는 말도 오래 남았다. 바쁘게 지낸다는 사실만으로 의미 있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생각할 틈도 없이 남들이 하는 일을 따라가는 분주함은, 어쩌면 불안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교육에서도무엇을 더 가르쳐야 하는가?”에 앞서학생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AI가 중요해졌다는 이유로 모든 학생에게 AI 과목을 필수로 이수하게 하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배워야 할 의무를 하나씩 더하는 것이 과연 좋은 교육일까. 강연에서 언급한깜지의 사례도 같은 맥락으로 들렸다. 무엇인가를 많이 시키면 교육을 충분히 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기회는 줄어들 수 있다. 교육의 충실함을 과제의 양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학생에게 자기 배움의 주도권을 얼마나 돌려주고 있는지도 함께 물어야 한다. 학생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디에 시간을 쓰는지, 지금보다 더 진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경로만으로 그들의 가능성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도 돌아봐야 한다. 교수의 역할 역시 지식과 경험을 전하는 데서 더 나아가, 학생이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돕는 데까지 확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온 내용도 기억에 남는다. “600 vs. 7,000—12배 비싼 아이스크림”, “19,900원의 마법이 끝난다, AI는 미혹되지 않는다”, “스마트 냉장고의 꿈은 검은 비닐봉지 앞에서 멈췄다”… AI가 가격을 냉정하게 비교하는 시대에도 사람은 여전히 600원짜리 대신 7,0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산다. 사람의 선택에는 기능과 가격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험과 이야기, 분위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편 아무리 똑똑한 냉장고라도 사람이 음식을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넣는 순간,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기 어려워진다. 보통 그런 봉지 안에 몸에 좋은 음식이 들어 있는데 정작 스마트 냉장고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이야기에 웃음이 났다. 기술이 가정하는 생활과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는 생활 사이의 간격을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로봇이 일하는 뷔페, 발레를 배우는 파인다이닝이라는 대비도 기억에 남는다. 효율성이 중요한 서비스에서는 로봇의 역할이 커질 것이다. 반면 사람과의 만남 자체가 경험의 일부인 곳에서는 더욱 섬세한 인간성이 요구될 수 있다. 동작 하나, 말투 하나, 접시를 내려놓는 모습 하나까지 고객의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AI가 발전할수록인간이 해야 할 일에 대한 기대도 더 구체적이고 까다로워지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송 작가님이 제시한직접 한다, 발행한다, 이유를 본다는 세 가지 원칙이 와닿았다. 직접 해 보고,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세상에 내놓으며, 왜 이 일을 하는지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앞으로의 경쟁력은 지식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만으로 결정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선택했는가. 왜 그것을 하는가. 직접 해 보았는가. 세상에 내놓았는가. 그리고 누군가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그 사람의 역량을 더 잘 보여 줄지도 모른다.


강연을 들으며수고라는 단어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수고를 노동시간의 총량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송 작가님의 표현을 빌리면, 수고는사고와 시도의 총합에 가깝다.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한 뒤 직접 시도하고, 실패하면 수정하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가치를 만들어 가는 시간이다. 그래서 강연 초반에 들었던근면함이 끝난다는 문장도 강연이 끝난 뒤에는 다르게 다가왔다. 근면함이 향해야 할 대상이 바뀌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남보다 더 많이 외우고, 더 많은 자격증을 따고, 정해진 일을 더 오래 반복하는 데 쏟았던 성실함을 이제는 자신의 질문을 오래 붙들고, 스스로 방향을 선택하며, 자신만의 원본을 만들어 가는 데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지도하는 대학원생들만이라도 AI 시대에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며, 서로 협력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효율성을 중요하게 여기되, 그것만으로 모든 가치를 판단하지 않았으면 한다. 본인의 시간을 희생하며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배려, 동료의 시행착오를 함께 안타까워하는 마음, 내가 하기 싫어도 함께 이기에 이를 감내하는 태도 역시 소중하기 때문이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이라는 말로 대표되곤 하는 산업공학의 지향점도 이제는 바뀌어야 할 것 같다. 무조건 옵티말(optimal)만 외치지 말자. 무엇을 최소화하고 무엇을 최대화할지에 앞서, 누구를 위한 효율이며 어떤 삶을 위한 최적화인지를 물어야 한다